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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의 기사]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

 

 

축일: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St. Maximilian Maria Kolbe

 

1894년 1월 8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라이몬드(Rajmund Kolbe)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1년에 유기서원을 하였고,

1917년에는 로마에서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께 대한 자녀다운 효성에 불타는 마음에서

"성모 기사회"라는 신심 단체를 설립하였다.

1918년, 그는 로마에서 서품받고 폴란드로 귀향하여, 월간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하였다.

1927년, 그는 와르소에서 25마일 거리가 되는 곳에 무염시태 성모의 마을을 세웠는데,

그는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성모님의 보호와 도우심 밑에서 이와 비슷한 마을을 일본과 인도에도 세웠다.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년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에 갇힌 뒤 배에 실려 크라쿠프 교구 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이곳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았는데,

처음에는 굶주리다가 마지막에 페놀(석탄산) 주사를 맞고 1941년 8월14일 죽었으며 화장되었다.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파티마에서 태양의 기적이 일어난 지 며칠 후에 로마에서는 프란치스꼬회의 젊은 수사가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십자군, 즉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단'을 세웠는데 그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1917년 6월 24일 로마에서는 '프리메이슨'(Free Mason:비밀 결사단) 설립 200주년 행사가 있었다. 그들은 사탄의 깃발을 들고 베드로 광장을 돌아다니며 시위하였는데, 그 깃발에는 "교황을 사탄의 노예가 되게 하여 사탄이 바티칸에서 다스리게 하자" 라는 암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1912년부터 그레고리안 신학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는 중이었고 이 놀라운 시위 행렬을 직접 목격하였다.신부님은 이렇게 말했다.

"바티칸 바로 밑에서 사탄이 미카엘 대천사를 짓밟는 그림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떠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나는 이 결사단과 투쟁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모의 기사단 창설

 

신부님은 이 단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보호 아래 맡겼다.

콜베 신부님의 성모님께 대한 사랑은 그 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써 실제로 성인은 무릎을 꿇고 많은 기도를 하였다.

성인은 많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성모 마리아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그분으로 하여금 특별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고 마침내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투쟁 단체

 

콜베 신부님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기사단을 세우실 때 하나의 투쟁단체, 즉 새로운 기사단을 결성하고자 하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완전한 봉헌과 성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죄인들과 비신자들을 위한 기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믿는 굳은 신뢰심으로 성모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활발하게 일하는 단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회원들은 이러한 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적의 패를 착용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에게

"이 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큰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도시

기사단을 세운 지 10년만에 콜베 신부님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도시라는 '니포칼라노프'(Niepokalanow)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기사' 라는 잡지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 젊은 신부는 두 개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과 행동이 겸손했으므로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 도시에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매스콤센터를 만들었고, 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기사단을 설립했는데 신부님께서는 당신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예감하고 당신의 영적인 아들들에게 한가지 유언을 남기려 하셨다.
다음의 내용은 수도회사(修道會史)를 쓰는 수사가 이 자리에 참석하여 직접 들었던 내용이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어느 날 저녁에 몇 명의 수사들이 신부님을 둘러싸고 있을 때에 신부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 주위에 가까이 둘러 앉으라" 하셨다.
신부님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은 아주 엄숙했으며 자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소중한 자녀들아,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아직 너희들과 함께 머물고 있지만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죽을 것이고 너희들은 남아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 아주 조용해지자, 신부님께서는 평소의 습관대로 스카풀라 밑에 손을 밀어 넣으시고 마치 놀라운 것을 감추어 놓기라고 한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 들려 주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그래도 되겠지?"
"예! 아버지, 말씀하십시오." 수사들이 이렇게 대답하며 아주 가까이 다가앉자 신부님은 매우 기쁜 감흥에 젖어 말씀을 계속 하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으면 좋겠다. 내 마음은 지금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넘쳐있다."
한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신부님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씀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라. 그분께서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 너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려라. 누구나 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알아주지 않지만, 무릎을 꿇고 이러한 은총을 간청하는 이들에게는 그 은총을 부어 주신다. 다만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신부이신 마리아를 알아듣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감격에 넘친 눈물을 흘리셨다.


마리아의 사업

콜베 신부님은 다른 다섯 명의 신부들과 700명의 수사들과 함께 그 당시 구라파에서는 가장 훌륭한 출판, 인쇄 사도직 단체를 만들었다.
여러 곳에서 얻어 온 낡은 인쇄기계로 시작하여 작가, 편집자, 식자공, 인쇄공의 역할을 모두 혼자서 해냈으며 밤새도록 아주 힘든 작업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인쇄와 출판 분야에 있어서 발송기계까지 포함된 최신식 기계를 갖추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수사들이 다른 곳에서 일했더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겠지만, 그들은 다만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일했다.
이리하여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 기사단의 잡지는 100만 부가 넘게 되었고 추기경들과 공산장의 고위 간부들이 방문을 왔다.
이 친구들과 적들은 니포칼라노프(Niepokalanow)의 기적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전 세계로 확산되다

 

콜베 신부님이 처음부터 가진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세상을 원죄없으신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이었으므로 당신의 고향인 폴란드에만 그치지 않고, 또 방송국으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1930년 일본에 지부를 세우고 1932년에는 인도에 세 번째의 지부를 세웠다.

그 사이 콜베 신부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수고와 고통으로 항상 중병을 앓았다.

저녁에는 손으로 일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동료들을 도와 주었으며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그들과 함께 머물렀다.

밤 11시까지 일이 늦어지더라도 다른 수사들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서 좀 쉬라는 말을 해도 오히려 그는 의자에 앉아서 기도했다.

1936년에 신부님은 폴란드의 지부장이 되어 일본에 있는 사업, 즉 마리아의 도시를 떠나기가 몹시 힘들었지만 그는 순명하였다.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께서 장상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체포되다

 

신부님은 1941년 다른 4명의 사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는데 같이 체포된 사람들은 콜베 신부님을 아버지같이 사랑하였다.

그들은 감방에서의 신부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교도관이 신부님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했을 때 신부님은 '친구들이여, 나와 함께 기뻐하자. 이 모든 것은 영혼을 위하여 도움이 되고 원죄없으신 마리아를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콜베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되었는데 그곳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운반해야 했고 50대의 매를 맞기도 했다.

동료들이 신부님을 침대에 눕혀 놓으면 병자들은 침대 곁으로 몰래 찾아가 고백성사를 받고 위로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신부님의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라면 하지 못할 영웅적인 행동은 없다" 라는 교훈적인 말씀은 어떤 순간적인 감정의 말씀이 아니라 진실된 말씀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신부님은 성모 승천 대축일 전야에 같이 체포되었던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신부님은 형제들에게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다.

인간은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게 마련이다.

 

 

 

 


어머니의 증언

콜베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의 어머니께서는 이러한 얘기를 들려 주셨다.
한번은 아들이 집에 있는 성모 마리아 제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는 그 이유를 어머니께 오랫동안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건 비밀이니까 어머니께서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는 비밀이 필요 없다고 아들을 인식시키자 라이문도(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세례명)는 고백했다.
"내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성모상이 움직이더니 성모님께서 두 개의 관, 붉은 관과 흰 관을 보여 주셨습니다. 흰 관은 정결을 의미하고 붉은 관은 치명을 의미한다고 성모 마리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나에게 '이 관들은 모두 너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이 관들을 갖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 원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고 결코 취소되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빛

 

신부님은 닥쳐오는 고통과 곤란을 은총으로 생각했으며 본명 첨례를 지낼 때 수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고통이 멀리 있을 때는 각오하고 있는 것이 쉽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고통이 바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으니 고통을 당할 이 기회를 씩씩하게 받아들이자."

그 당시 히틀러의 부관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폴란드에는 모든 빛이 꺼졌지만 첸스토하우(Tschenstochau)의 거룩하신 분(일명 야스나고라의 성모님)과 교회의 빛만은 꺼지지 않았다. 우리가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이다."

이러한 사람을 독일의 게슈타포(비밀경찰)가 찾았다.

20명의 수사들이 대신해서 수용소에 가겠다고 하였으나 콜베 신부님은

"나는 그 무서운 수용소에서 끝까지 머물겠다" 라고 하였다.

수용소는 지옥이었다. SS친위대원 하나가 콜베 신부님에게 세 번씩이나 물었다.

"이 바보같은 녀석아! 예수를 믿느냐?" 신부님께서 믿는다고 대답하면 할수록 그 친위대원은 주먹과 발길질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신부님을 짓밟았다.

신부님은 놀란 죄수들에게

"놀라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이것은 다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콜베 신부님은 지옥의 힘도, 사탄의 힘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신부님은 프란치스꼬회 수도복 대신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며 수의 번호는 16670 이었다.

신부님의 수의는 피와 땀으로 젖어있었다.

신부님께서는 계속해서 학대를 받다가 모든 것을 성모 마리아께의 봉헌을 끝으로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치명의 월계관을 향해서

 

콜베 신부님이 수용된 감방의 죄수 하나가 도망을 쳤다.

교도관들은 그를 찾기 시작했고 동시에 모든 죄수들은 공포에 떨었다.

왜냐하면 한 죄수가 도망하면 10명이 아사감방에 넣어져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죄수가 다 마당에 모이게 되었다.

죄수들이 침묵과 고요 속에서 떨고 있을 때 교도관이 나서서 사형선고를 내렸다.

 

"오늘 그 한 사람 대신에 10명이 죽을 것이다."

교도관은 10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아사감방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 가죠프닉체크(Gajwniczek)라는 죄수가 있었는데 콜베 신부님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쓰러져서 눈물을 흘리며 아내와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바로 그때 콜베 신부님이 일어나서 교도관에게 청했다.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겠으니 허락하여 주시오."

그러자 교도관은 "이 폴란드 돼지야!" 라고 소리질렀으나 콜베 신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이 사람은 부인과 자녀들이 있으니 가톨릭 사제인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겠소."

교도관은 한동안 어이가 없다는 듯 말문이 막혔다.

마침내 교도관은 "알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라고 승락하였다.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대신 죽겠다는 콜베 신부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람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선정된 10명은 옷을 모두 벗고 맨 몸으로 아사감방에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무서운 나날들을 보냈다.

매일 한 사람씩 죽어나갔고 한 방울의 물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소변을 마셔야 했다.

처음에는 저주의 소리와 광란의 절규가 터져 나왔으나 그러한 소리는 차츰 사라져 가고 그 대신 기도와 찬송, 성모 마리아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콜베 신부님을 따라 저주의 음성이 사랑의 노래로 바뀌어 나갔던 것이다.

신부님은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 되자 모두 죽고 4명만이 살아있었다.

수용소 측에서 그 아사감방을 필요로 하여 남은 4명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았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얼굴은 아주 밝게 빛났고 눈은 한 곳을 집중하여 바라보며 열려 있었다.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그들은 신부님의 시체를 관에 넣어 화장터로 옮겨갔다.

이리하여 콜베 신부님의 다음과 같은 소원이 이루어졌다.

"나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가루가 되리라."

현재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의 무덤은 없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땅이 바로 그의 무덤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 을 증명하셨습니다."

 

 

 

 

 

가죠프닉체크(Franciszek Gajowniczek)

 

콜베 신부님이 목숨을 구해준 프란시스 가조브닉체크는 그 후 53년을 더 살다가 1995년 3월 13일 95세의 나이로 폴란드의 브르젝(Brezeg)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남루했던 신부님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석방된 후, 그는 꿈에 그리던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은 살아있었으나 두 아들은 전쟁 중에 죽었다. 매년 8월 14일이 되면 그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찾았다. 그 다음 오십년간을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콜베신부님을 기리고 존경하며 살았다.

 

 

 



본 내용은 2009년 12월 4일 상기 카페 운영자님의 홈페이지 게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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